탈북여성 우영복의 유럽의회 청원서 “35년째 사라진 오빠, 우영길을 기억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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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유럽의회 의원님들과 유럽 인권 시민사회 여러분께,
저는 우영복입니다. 저는 지금도 살아 있기를 간절히 믿는 오빠 우영길을 기억하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2남 2녀 중 장남이었던 오빠는 지금으로부터 35년 전, 함경북도 청진시 제25호 수성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아마 지금 만난다 해도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에게 오빠는 아직도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를 향한 가족의 사랑과 신념, 그리고 고통의 기록을 들고 이 유럽의회에 왔습니다.
오빠 우영길은 평범한 노동자 집안의 자식이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특별하지도, 불순하지도 않은 북한의 ‘모범’ 가정이었습니다. 오빠는 국가에 헌신하는 길을 택해 자진입대했고, 인민군 복무 중 분대장, 초급당위원장이 되었습니다. 그의 노력과 성실은 우리 가족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 11월, 돌연 ‘남조선 안기부와 연계한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었습니다. 죄목은 ‘산삼을 신문지로 포장해 남조선 요원에게 넘겼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보위부의 날조였습니다. 동료 군인조차 “신문지 포장설은 조작”이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날 이후 저희 가족은 갑자기 정치범 가족이 되었고, 고통의 수렁에 빠졌습니다. 양강도농촌경리위원회 영농물자수송대 초급당 부비서 겸 노동지도원까지 하시던 아버지는 정치적 탄압과 박해로 일을 그만두셨고, 결국 병을 얻어 생을 마감하셨고, 언니는 결혼 생활이 파탄 났으며, 조카딸은 결혼 일주일 만에 파혼 당했습니다. 저희 가족은 오빠의 누명과 낙인으로 사회에서 완전히 추방당했습니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2006년, 정치범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한 한 남성으로부터 오빠의 생존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분의 증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남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신문으로 산삼을 싼 적도 없습니다. 반탐처 구류장에서 매일같이 고문을 당했고, 지금도 왼쪽 눈이 떨리고 한쪽 귀가 거의 들리지 않습니다. 나의 억울함을 가족에게 꼭 전해달라.”
오빠는 여전히 살아 있고, 지금도 억울함을 안고 어둠 속에서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서 저희 가족은 그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었고, 누구도 이 부당함을 바로잡아 주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저희들은 오빠의 억울함을 바로잡기 위해 자유의 땅 대한민국으로 왔고, 오늘 국제사회에 호소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사라진 저희 오빠를, 그리고 수많은 정치범과 그 가족을 기억해주십시오.
진실을 말할 수 없고, 항변조차 허용되지 않는 북한의 공포 정치 속에서 살아온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주십시오.
그리고 저희 가족이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우영길의 생존과 석방을 위한 국제사회의 연대를 모아주십시오.
정치범수용소는 단지 한 개인을 억압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족 전체를, 인간의 존엄과 사랑을 뿌리째 파괴하는 범죄입니다.
유럽이 그 누구보다 자유와 인권의 가치를 중시하는 대륙임을 저는 믿습니다.
이 간절한 외침을 외면하지 말아주십시오.
그 작은 관심과 연대가, 오빠에게는 생명을, 저희 가족에게는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5년 6월 1일
우영복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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